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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표지

파친코

이민진 · 인플루엔셜 · 2022

저자
이민진
출판
인플루엔셜
출간
2022
난이도
보통
완독 시간
12~16시간
별점

《파친코》는 부산 영도의 소녀 선자에서 시작해 오사카로 건너간 그 자손들까지, 20세기 내내 일본에서 이방인으로 살아낸 재일조선인 4대의 가족사를 그린 이민진의 장편소설이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가 영어로 썼고 국내에는 인플루엔셜에서 전 2권으로 번역 출간됐다. 이 글은 선자의 삶을 시간순으로 따라가는 줄거리 전체와 고한수·백이삭이라는 두 남자의 의미,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첫 문장이 왜 그렇게 유명한지, 그리고 애플TV+ 드라마와 원작이 어디서 갈라지는지까지 정리한다.

나라도 이름도 자기 것이 아닌 사람들이, 그럼에도 다음 세대를 살려내려 버틴 백 년의 기록.

줄거리 요약

이야기는 1900년대 초 부산 영도의 작은 하숙집에서 시작한다. 언청이에 발을 저는 어부의 아들 훈이는 성실함 하나로 양진과 혼인해 하숙을 꾸리고, 늦게 얻은 딸 선자를 금이야 옥이야 키운다. 훈이가 세상을 떠난 뒤, 열여섯 선자는 시장에서 자신을 건달들로부터 구해 준 중년의 생선 중개상 고한수에게 마음을 연다. 오사카를 오가는 부유한 그는 선자에게 세상을 보여 주고, 선자는 그의 아이를 갖는다. 그러나 한수에게는 이미 일본에 아내와 세 딸이 있었다. 그는 선자를 정식 아내가 아닌 "따로 살림을 차려 주는" 여자로 두려 하고, 선자는 그 제안을 단호히 거절한다.

파국이 될 뻔한 자리를 메우는 인물이 백이삭이다. 폐결핵을 앓다 하숙집에서 요양하던 젊은 평양 출신 목사 이삭은, 임신한 선자의 처지를 알고도 그녀와 혼인해 아이에게 자기 성을 준 뒤 오사카로 데려간다. 선자의 삶에서 한수가 '욕망과 세속의 힘'이라면 이삭은 '연민과 신앙의 힘'이다. 소설의 큰 축은 이 두 남자 사이에서 선자가 무엇을 지키며 사는가에 있다.

오사카 이카이노의 조선인 빈민가에서 선자는 이삭의 형 요셉, 형수 경희와 한집에 산다. 첫아들 노아(한수의 핏줄이지만 이삭의 아들로 자란다)와 둘째 모자수가 태어난다. 목사 이삭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신앙 문제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오래 갇혔다가, 몸이 완전히 상한 채 풀려나 곧 숨을 거둔다. 가장을 잃은 여자들은 김치를 담가 시장에 내다 팔며 생계를 잇는다. 전쟁이 격해지자, 가족 곁을 늘 멀리서 지켜보던 한수가 다시 나타나 이들을 시골 농장으로 피신시켜 공습에서 살려 낸다.

전후, 노아는 학문을 향한 갈망으로 와세다대학에 진학한다. 학비는 한수가 몰래 댄다. 그러나 노아는 자신의 친아버지가 야쿠자와 얽힌 한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존경하던 목사 이삭의 아들이 아니라는 정체성의 붕괴를 견디지 못한다. 그는 모든 인연을 끊고 사라져, 나가노의 파친코 가게에서 일본인 '반 노부오'로 신분을 감춘 채 새 삶을 산다. 반면 학교를 일찍 떠난 모자수는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어 크게 성공한다. 조선인에게 열려 있던 몇 안 되는 생업이 바로 파친코였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선자는 수소문 끝에 노아를 찾아낸다. 하지만 어머니와 재회한 직후, 오래 숨겨 온 정체가 무너지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 노아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이야기의 마지막 세대는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이다. 미국에서 교육받고 국제 금융계에 발을 들인 그조차, 일본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여전히 '외국인 등록'을 갱신해야 하는 재일조선인으로서 차별의 벽을 마주한다. (선자가 노아·모자수의 삶의 끝에서 무엇을 깨닫는지 결말이 궁금하다면, 마지막 장은 노년의 선자가 남편 이삭의 무덤 앞에 서는 조용한 장면으로 매듭지어진다.)

핵심 내용 정리

첫 문장 —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소설을 여는 이 문장은 작품 전체의 태도를 압축한다. 식민, 전쟁, 분단, 차별 — 개인이 어쩌지 못한 거대한 역사가 이 가족을 끝없이 짓밟는다. 그러나 소설은 역사를 원망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아래에서 밥을 짓고 아이를 먹이고 하루를 버틴 사람들의 '그래도 상관없다'는 생활의 힘에 초점을 맞춘다.

나라가 우리를 저버렸다 해도, 오늘 아이가 먹을 밥과 내일 팔 김치는 여전히 내 손에 달려 있다.

제목이 '파친코'인 이유

재일조선인은 취업·주거·금융에서 광범위한 차별을 받았고, 그들에게 열려 있던 몇 안 되는 사업 중 하나가 파친코였다. 동시에 파친코는 이 소설의 은유다. 손님은 자기 실력으로 이긴다고 믿지만, 못의 각도는 가게 주인이 밤마다 손봐 둔다. 판이 기울어 있음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다음 판에 희망을 건다 — 이 가족이 일본에서 살아온 방식이 꼭 그러하다.

판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불리하게 맞춰져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자들이 짊어진 무게

선자, 양진, 경희로 이어지는 여성 인물들은 이 소설의 진짜 기둥이다. 남자들이 신념·사업·정체성 때문에 흔들리거나 사라지는 동안, 여자들은 김치를 담그고 사탕을 팔며 가계를 떠받친다. 이민진은 '희생'을 미화하지 않고, 그 노동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고된지를 냄새와 손끝의 감각까지 밀착해 그린다.

좋았던 점과 아쉬운 점

좋았던 점

  • 한 인물도 도식적이지 않다. 야쿠자와 얽힌 한수조차 단순한 악인이 아니라, 자기 방식으로 핏줄을 끝까지 챙기는 모순된 인간으로 그려진다. 선악의 구도가 아니라 생존의 결들로 인물이 선다.
  • 역사를 설교하지 않고 생활로 보여 준다. 신사참배 거부, 관동대지진 이후의 공기, 외국인 등록증 같은 소재가 사건의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하루 속에 녹아 있어, 배우지 않고도 재일조선인의 처지를 몸으로 느끼게 한다.
  • 4대를 아우르는데도 산만하지 않다. 선자라는 중심축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붙들어, 세대가 넘어가도 감정의 실이 끊기지 않는다.

아쉬운 점

  • 후반부 세대일수록 밀도가 옅어진다. 선자·이삭·노아 세대의 묘사가 압도적으로 깊은 데 비해, 솔로몬 세대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빠르게 지나가 다소 요약적으로 느껴진다.
  • 번역서 특유의 거리감. 원작이 영어로 쓰였기에, 한국 독자에게는 조선인의 정서를 '바깥에서 다시 옮겨 온' 듯한 미묘한 온도차가 느껴지는 대목이 있다.
  • 분량의 압박. 전 2권의 긴 호흡이라, 빠른 전개를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초중반의 잔잔한 생활 묘사가 더디게 느껴질 수 있다.

이 책이 필요한 사람

  • 애플TV+ 드라마 《파친코》를 보고 원작의 전체 서사와 뒷이야기가 궁금해진 사람.
  •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이민 2·3세의 정체성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
  • 《토지》나 대하 가족소설처럼, 한 가문을 통해 시대를 통째로 읽는 서사를 좋아하는 사람.
  • 반대로, 빠른 사건 전개와 뚜렷한 결말의 카타르시스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더디게 느껴질 수 있다.

인상 깊은 부분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은 노아가 자신의 뿌리를 알게 된 순간이다. 그는 평생 목사 이삭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자기 존엄의 근거로 삼아 왔다. 야쿠자와 얽힌 한수가 친아버지이며 학비마저 그 돈이었다는 진실은, 그가 쌓아 온 '깨끗한 자아'를 통째로 무너뜨린다. 노아의 비극은 차별하는 일본 사회가 아니라, 차별을 이겨 내려 스스로에게 부과한 '완벽하게 떳떳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온다는 점이 아프다. 정체성이 외부의 낙인만이 아니라 내부의 자기 검열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음을, 이 소설은 노아를 통해 조용히 보여 준다.

읽고 나서

《파친코》를 덮고 나면, 뉴스에서 스치던 '재일교포'라는 단어가 더 이상 추상적이지 않다. 이 책은 국적이라는 서류 한 장이 한 사람의 하루를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생활의 높이에서 보게 만든다. 읽은 뒤 해볼 수 있는 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 내 조부모나 부모가 '어쩌지 못한 시대' 속에서 무엇을 지키며 살아 냈는지 한 번 물어보는 것. 선자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 각자의 윗세대에게도 있었을, 기록되지 않은 버팀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소년이 온다 — 개인이 어쩌지 못한 역사의 폭력 아래 놓인 사람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는 점에서 《파친코》와 깊이 맞닿아 있다.
  • 채식주의자 — 사회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규범과 그에 저항하거나 짓눌리는 인간을 다룬다는 점에서 함께 읽어 볼 만하다.

자주 묻는 질문

특정 실존 인물의 전기는 아니지만, 재일조선인이 실제로 겪은 역사적 사실에 촘촘히 뿌리를 둔 소설이다. 이민진은 수년간 재일교포들을 취재해, 개별 인물은 허구이되 그들이 놓인 상황은 사실에 충실하게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