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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표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 곰출판 · 2021

저자
룰루 밀러
출판
곰출판
출간
2021
난이도
보통
완독 시간
5~7시간
별점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전문기자 룰루 밀러가 19세기 어류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생애를 추적하며 자신의 무너진 삶을 겹쳐 쓴 논픽션이다. 제목은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주장이고, 그 주장에 도달하기까지 책은 전기와 회고록과 과학 에세이 사이를 계속 옮겨 다닌다. 이 글에서는 줄거리의 큰 줄기와 중반의 어두운 반전, 그리고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대체 무슨 뜻인지를 결말을 망치지 않는 선에서 정리한다.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려 평생을 바친 한 남자의 이야기가, 그 질서를 세우려는 의지가 어디까지 인간을 망가뜨릴 수 있는지에 관한 경고로 뒤집힌다.

줄거리 요약

시작은 저자 자신이다. 룰루 밀러는 어린 시절 과학자였던 아버지에게서 "너는 우주의 먼지 한 톨이고, 삶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말을 반복해서 들으며 자랐다. 성인이 된 그는 사랑을 잃고, 자기 손으로 관계를 무너뜨리고, 우울의 바닥에서 왜 계속 살아야 하는지를 찾지 못한다. 혼돈이 결국 모든 것을 이긴다면, 어떻게든 버티는 사람들은 무엇을 붙들고 있는 걸까. 밀러는 이 질문의 답을 찾을 만한 인물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발견한다.

조던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를 산 어류분류학자다. 그는 당대에 알려진 어류 종의 약 5분의 1을 발견해 이름 붙인 인물이자, 스탠퍼드 대학교의 초대 총장이었다. 그가 한 일은 본질적으로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었다. 이름 없는 물고기를 잡아 병에 담고, 라벨을 붙이고, 생명의 나무 위 정확한 자리에 배치하는 일. 밀러가 그에게 끌린 이유가 여기 있다. 조던은 세계가 아무리 무의미하게 흩어져도 굴하지 않고 계속 이름표를 붙이는, 의지의 화신처럼 보였다.

그리고 세계는 실제로 그의 작업을 반복해서 부순다. 번개가 치고, 화재가 나고, 마침내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그의 표본실을 덮친다. 수십 년에 걸쳐 모은 물고기 표본 수천 점이 담긴 유리병들이 바닥으로 쏟아져 산산조각 난다. 라벨은 표본에서 떨어져 나가 뒤섞이고, 어떤 물고기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평생의 작업이 한순간에 이름 없는 잔해로 돌아간 것이다.

여기서 조던이 보인 반응이 이 책의 심장이다. 그는 절망하는 대신 바늘과 실을 집어 든다. 그리고 살아남은 표본 하나하나에 이름표를 직접 바늘로 꿰매기 시작한다. 다시는 라벨과 물고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밀러는 이 장면에서 그가 찾던 답을 본다. 세계가 아무리 너를 부숴도 다시 바늘을 드는 그 완강함이야말로 무의미를 이기는 방법이 아닐까. 책의 전반부는 이 감탄으로 채워진다.

그런데 밀러가 조던을 더 깊이 파고들수록, 그 완강함의 바닥에서 전혀 다른 것이 올라온다. 세계에 질서를 강제하려는 그의 의지는 물고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에게로 향했고, 이 지점에서 이야기는 존경에서 공포로 방향을 튼다.

핵심 내용 정리

혼돈에 맞서는 사람이라는 초상

책의 전반부는 조던을 거의 영웅적으로 그린다. 자연은 끊임없이 그의 질서를 무너뜨리지만 그는 매번 다시 일어선다. 밀러가 던지는 질문은 자기계발서의 질문과 겉보기엔 비슷하다. 어떻게 하면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지만 밀러는 그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여, 포기하지 않는 태도 자체가 언제 독이 되는지를 묻는 데까지 간다.

세계는 그가 쌓은 것을 몇 번이고 무너뜨렸지만, 그는 매번 다시 바늘을 들어 이름표를 꿰맸다. 문제는 그 손이 물고기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데 있다.

질서를 향한 의지가 향한 곳

조던은 우생학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는 인류에게서 "바람직하지 않은" 형질을 솎아내야 한다고 믿었고, 그 신념은 실제 정책으로 이어져 무수한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을 남겼다. 물고기를 분류하던 바로 그 손, 세계를 위계로 정돈하려던 그 충동이 인간을 등급 매기는 일로 이어졌다는 사실 앞에서, 밀러가 전반부 내내 품었던 존경은 무너진다. 이 책이 단순한 위인 전기가 아니라 위험한 확신에 대한 해부인 이유가 여기 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의미

제목의 뜻은 후반부에 밝혀진다. 이것은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분기학(cladistics)이라는 현대 분류학의 실제 결론이다. 진화적 계통을 엄밀하게 따져 보면 우리가 "어류"라고 묶어 부르는 범주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집단이 아니다. 이를테면 폐어는 다른 물고기보다 오히려 소나 사람 같은 육상 동물에 더 가깝다. "물고기"라는 깔끔한 상자는 인간이 편의로 그어 놓은 선일 뿐, 자연에는 그런 경계가 없다.

물고기라는 범주는 자연이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어 놓은 선이다. 그 선을 지우고 나면, 세계는 우리가 채워 넣으려 했던 것보다 훨씬 넓다.

밀러는 이 과학적 사실을 삶의 태도로 번역한다. 우리가 확신하는 분류와 경계가 사실 임의적일 수 있다면, "옳다"고 굳게 믿는 것을 한 번쯤 의심하는 겸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조던의 비극은 자신의 분류가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데서 왔다.

좋았던 점과 아쉬운 점

좋았던 점

  • 장르를 넘나드는 구조가 주제와 맞물린다. 전기·회고록·과학 에세이가 뒤섞인 형식 자체가 "깔끔한 분류란 없다"는 이 책의 논지를 그대로 구현한다. 형식과 내용이 따로 놀지 않는다.
  • 반전의 설계가 정직하다. 독자를 조던에게 감정이입시킨 뒤 그 감정을 스스로 배신하게 만든다. 값싼 폭로가 아니라, 확신이 어떻게 사람을 눈멀게 하는지 독자가 직접 체험하도록 짜여 있다.
  • 과학을 삶의 언어로 옮기는 솜씨. 분기학이라는 다소 낯선 개념을 상실과 회복이라는 개인적 이야기로 착지시킨다. 과학책이 이렇게 따뜻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 역자의 문장이 좋다. 정지인의 번역은 원문의 정서적 진폭을 매끄러운 한국어로 옮겨 읽는 저항감이 적다.

아쉬운 점

  • 개인사와 조던 서사의 접합이 느슨할 때가 있다. 저자 자신의 연애·우울 이야기가 조던의 생애와 언제나 팽팽하게 맞물리지는 않아, 일부 대목은 삽입처럼 읽힌다.
  • 후반부의 교훈이 다소 선명하게 정리된다. 앞부분이 모호함의 힘을 이야기한 데 비해, 결말의 메시지는 오히려 또렷하게 떨어져 살짝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수 있다.
  • 우생학 대목의 밀도. 조던의 우생학 행적은 이 책의 핵심 전환점인데, 역사적 파장에 비하면 서술이 압축적이어서 더 깊이 알고 싶은 독자에겐 부족할 수 있다.

이 책이 필요한 사람

  •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시기를 지나며, 그럼에도 버티는 이유를 붙들 언어가 필요한 사람.
  • 과학 논픽션을 좋아하지만 딱딱한 교양서보다 이야기로 다가오는 책을 찾는 사람.
  •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정말 옳은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고 싶은 사람.
  • 다만 명쾌한 결론과 실용적 요약을 원하는 독자에겐 비추천이다. 이 책은 답보다 흔들림을 주는 쪽에 가깝다.
  • 무거운 우울·상실 서사가 부담스러운 시기라면 잠시 미뤄 두는 편이 낫다.

인상 깊은 부분

지진으로 표본이 모두 깨진 뒤 조던이 바늘로 이름표를 꿰매는 장면은, 읽는 방향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된다. 처음 이 장면을 만났을 때는 무너지지 않는 인간에 대한 감동으로 읽힌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장면을 되짚으면, 같은 손짓이 오싹하게 다가온다. 자기 질서가 옳다는 확신을 결코 놓지 않는 그 완강함은, 물고기를 다시 이름 붙이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인간을 분류하고 배제하는 데까지 나아갔기 때문이다. 하나의 장면을 감동과 공포 양쪽으로 동시에 읽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 책이 독자에게 남기는 가장 서늘한 성취다.

읽고 나서

이 책이 바꾸는 관점은 하나로 압축된다. 확신은 힘이지만, 검증되지 않은 확신은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 세계를 향해 "이건 이렇다"고 단정하기 전에, 그 범주가 정말 자연의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은 선인지 한 번 더 묻는 습관. 당장 해 볼 수 있는 일은 소박하다. 오늘 내가 확신하는 판단 하나를 골라, 그것이 틀렸을 가능성을 진지하게 상상해 보는 것. 조던이 끝내 하지 못한 그 한 가지가, 이 책이 권하는 유일한 실천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이기적 유전자 — 생명을 분류하고 이해하려는 과학적 시선이 어떻게 세계관을 바꾸는지 함께 보면, 조던의 분류 충동과 진화 사고의 계보를 더 넓게 읽을 수 있다.
  • 팩트풀니스 —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정면으로 겹친다. 확신을 의심하는 태도를 데이터의 언어로 다시 만나게 된다.

자주 묻는 질문

문자 그대로의 과학적 주장이다. 현대 분류학인 분기학의 관점에서 "어류"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계통 집단이 아니다. 예컨대 폐어는 다른 물고기보다 포유류에 더 가깝다. 즉 "물고기"라는 범주는 인간이 편의로 그어 놓은 선일 뿐 자연에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